0. 짧은 인사말
현대사회에 들어와서 우리는 넘쳐나는 각종 미디어 기기를 통해 우리의 한가한 시간을 소비합니다. 스마트폰, 컴퓨터등의 미디어 기기는 우리에게 정보습득 뿐만 아니라 유희기능 역시 제공하고 있습니다. 미디어 기기가 제공하는 유희기능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우리가 즐기는 유희기능이라면 게임을 이야기 할 수 있겠네요.
게임에는 여러 가지 장르가 있습니다. 대학생 여러분이 좋아하는 오버워치는 FPS (First Person Shooter / 1인칭 슈팅) 게임이고, 다른 인기게임인 리그 오브 레전드는 MOBA (Multiplayer Online Battle Arena / 다인 플레이어 온라인 전장, 이외에 AOS 혹은 DotA라고 불리기도 함) 게임입니다. 그리고 대학생들이 많이 들어보고, 많이 플레이하시는 분이 있을 법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RPG(Role Playing Game/역할 분담 게임)입니다.
이러한 게임들은 컴퓨터나 스마트폰, 게임기 등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데, 우리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엔 과연 무엇을 하고 놀았을까요? 아마 컴퓨터 발명 시점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거나, 제대로 된 게임을 즐길 수 없을 정도로 게임기가 개발되지 않았을 시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보드게임을 즐겼을 겁니다. 우리가 쉽게 접하는 보드게임으로는 부루마블이나 젠가 등이 있겠죠.
하지만 이러한 게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질린다는 단점이 있었고 보드게임을 즐기던 사람 중에는 보드게임의 일종인 미니어쳐 게임(조그마한 모형을 늘어놓고 즐기는 게임)을 즐기던 사람들이 이러한 단점을 고치기 위해 궁리를 하다 1970년대에 SF와 판타지, 그리고 미니어쳐 게임의 팬이었던 게리 가이갹스와 몇몇 동료들이 만든 D&D(Dugeons and dragons)를 내놓게 됩니다.
이러한 RPG게임은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획기적이었습니다. 상상력과 종이, 펜과 지우개면 마치 판타지 세상에 직접 들어간 듯이 몰입할 수 있었거든요. 지금도 미국이나 일본같은 해외에서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취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TRPG는 정확하게 무엇일까요?
1. TRPG란 무엇인가?
TRPG란 컴퓨터가 없던 시절, 사람이 종이에 지도를 그리고 대화로 캐릭터 조종을 하고 주사위 같은 소도구를 이용해서 진행했던 원조격 RPG로서, 요즘 비디오 게임의 멋진 그래픽은 없지만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고, 각종 규칙이나 시스템을 모아놓은 룰북이 출시되기는 하지만 게임시스템 제약 같은 게 없다시피 하므로 하고 싶은 행동은 거의 다 할 수 있는 게임입니다.
준비물은 자기가 맡은 캐릭터의 상세한 사항과 각종 능력치가 적힌 캐릭터 시트라는 종이와, 수정을 위한 펜과 수정도구, 각종 상황에서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처리하기 위한 주사위, 그리고 그러한 '캐릭터', '상황', '결과처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규칙서(Rule book)가 전부이고 게임 제작사나 컴퓨터가 제공해주는 시나리오만으로 진행되는 컴퓨터 게임(CRPG)와는 달리, 세계와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마스터'와 캐릭터를 가지고 모험을 해 나가는 '플레이어'로 진행됩니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현대의 RPG게임, 그러니까 MMORPG게임을 떠올려봅시다. 서버와 그래픽과 컴퓨터 역할을 '마스터'라고 부르는 인간 진행자가 전담하고, 그 서버에서 같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는 같은 테이블에 모여앉은 몇 명이 전부이며, 캐릭터 조종은 키보드나 마우스가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말을 하고 각종 이벤트 확률이나 공격 등의 판정은 표나 주사위를 사용해서 진행한다고 생각하면 편하실겁니다. 진행이 좀 더 단순하지만 마피아 게임 같은 것을 생각해봐도 좋습니다.
RPG는 보드게임/워게임에서 '캐릭터를 육성한다'는 새로운 개념을 창시해서 갈라져나온 먼 친척뻘이라서 현재의 컴퓨터나 콘솔 게임기의 다종다양한 RPG와 MMORPG 등, RPG라는 이름이 붙은 장르는 전부 TRPG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래 RPG라고 하면 원조인 TRPG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컴퓨터 RPG(굳이 구분하기 위해 CRPG라고 하기도 한다)가 대중화되자 RPG의 이미지가 컴퓨터 게임으로 고정되게 됩니다. 결국 원조 RPG를 CRPG와 구분하기 위해 일본에서 TRPG라는 단어를 만들었고, 한국에서도 일본식 표현을 받아들여 쓰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컴퓨터로 하는 RPG나 MMORPG와 구분하기 위해 Tabletop Role-playing(줄여서 Tabletop), Pen and Paper(PnP) 등을 사용한다. 한국이나 일본이 아닌 곳에서 TRPG라고 하면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Tabletop이라 하는 게 빠르죠.
화려한 그래픽과 사운드는 없지만, 다양한 특징과 배경을 가진 매력적인 여러 룰 시스템들과,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신만의 모험과 이야기를 즐길 수 있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게임입니다.
2. TRPG의 변천사
요즘에는 인터넷의 발달로 각종 채팅, 주사위 프로그램을 사용해 진행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은 ORPG라고 부르죠. 하지만 게임 자체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같은 탁자에 앉아서 얼굴 마주보고 대화로 진행하던 것을, 채팅으로 형태를 바꿨을 뿐입니다. 고로 ORPG 전용 하우스 룰(공식룰이 아닌 자작룰)을 적용하는 일이 많습니다.
미드 커뮤니티 시즌 2, 14화. AD&D라는 TRPG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TRPG가 가장 큰 인기를 끈 것은 미국으로서, 컴퓨터가 없던 7~80년대 사람들끼리 모여 룰북과 세계관을 연구해가며 플레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시절 TRPG를 하면서 자란 세대가 빅뱅 이론 등에서 덕후들이 TRPG를 플레이하는 등의 묘사를 자주 넣곤 합니다. 비디오 게임이 보편화된 21세기에는 인기가 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TRPG 자체의 특징은 컴퓨터 게임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기가 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아직도 군대나 교도소처럼 컴퓨터를 쉽게 접하기 힘들지만 여유시간은 많고 맨날 보는 사람들끼리 부대끼는 곳에서 꽤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당시 PC통신 동아리에서 개최한 RPG 컨벤션
우리나라에서는 천리안이나 하이텔같은 PC통신 세대들이 PC통신 게시판(게시판을 통해 즐기는 경우엔 Play By Post, PBP라고 부른다)을 통해 이 TRPG를 즐기거나 아니면 지역별 소모임을 만들어 실제로 만나서 TRPG를 즐기기도 했었습니다.
허나 다양한 내부적 사유와 IMF가 겹치면서 이러한 공식적인 지원은 끊기게 되었죠. 유일하게 남은 것은 다양한 세계, 장르를 플레이 할 수 있는 GURPS 시스템을 정발한 '도서출판 초여명' 뿐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초여명은 꾸준히 GURPS 시스템을 수입하여 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작 세계관을 다룬 책을 내기도 했죠.
다만 이후에 TRPG는 아는 사람만 아는, 소수의 매니아층의 취미이고 이제와서 국내에서 시장성을 가지기에는 무리라고 생각을 했었지만 우리의 생각을 뒤집듯, 여러 가지 TRPG 게임들이 크라우드 펀딩(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해 소규모 후원을 받거나 투자 등의 목적으로 인터넷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다수의 개인들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행위이다. '소셜 펀딩'이라고도 하나, 정확한 용어는 아니다.)을 통하여 국내에 들여오거나, 직접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도서출판 초여명의 CoC 펀딩. 2억원 가량의 돈이 모인 성공적인 사례
3. 직접 TRPG를 해보자!
여러분이 위에 소개한 TRPG를 직접 해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네이버에 위치한 대형 TRPG 커뮤니티인 네이버 TRPG 카페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직접 현실에서 같이할 친구들을 모으는 것이죠. 전자의 경우엔 기존 TRPG 플레이어들이 입문자인 여러분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면서 진행하기에 배우기 편하고 인터넷으로 진행되기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적다는 게 장점이지만, 모르는 사람들과 진행하기 때문에 꽤나 어색할 수 있다는 것이 단점입니다. 후자의 경우엔 직접 TRPG 책을 구매하고 이것저것 갖춰야하는 도구가 많고 현실에서 직접 만나서 해야 하니 장소와 시간적 제약이 있는게 단점이지만, 직접 아는 사람들과 진행하기에 어색함이 덜하고 이것저것 해보면서 재미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지요. 후자의 경우 “책을 사면서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시는 분들을 위해 고맙게도 도서출판 초여명에서 여러 가지 공개판 TRPG 룰을 인터넷에 게시해두었습니다.
네이버 TRPG CAFE
초여명에서 공개한 던전월드 한국어 룰
준비물이 다 갖추어진 상태라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게임을 진행할 차례입니다. 그럼 일반적으로 TRPG는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을까요? 조금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⓵ 게임 진행자(게임 마스터) 1인, 플레이어 1~6인 내외(평균 4인)로 사람을 모읍니다.
⓶ 게임을 선택합니다. 어떤 룰북을 택하느냐에 따라 게임의 배경과 방향성이 대체로 결정됩니다. D&D(던전 앤 드래곤)라면, 중세풍 판타지 세계에서 모험가 파티를 만들어 괴물을 때려잡고 던전을 털어서 보물을 모으는 스토리로 대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룰북은 정말 무수하게 많이 있어서, 현대 배경 탐정물, 슈퍼 히어로물, 근미래 사이버펑크 세계의 해결사물, 베트남 특수부대물 등등 생각할 수 있는 거라면 거의 다 할 수 있습니다.물론 로맨스 물이나 개그물을 플레이 가능한 룰도 당연히 있지요.
⓷ 룰북에 나온 규칙대로, 플레이어들은 각자 플레이어 캐릭터를 만듭니다.
⓸ 게임 마스터는 준비해둔 시나리오를 통해 일련의 기승전결이 있는 짧은 모험/단편극/사건 해결을 전개해나갑니다. 마스터는 플레이어들이 겪는 상황에 대한 나레이션으로 상황 전개를 이끌고, 플레이어 외의 캐릭터(NPC)를 조종합니다.
예를 들어 「D&D의 초보 모험가인 여러분에게 방앗간 주인이 의뢰를 해왔습니다. "마을 공동묘지에서 자꾸 시체가 되살아나고 있소 해결을 해준다면 보상을 하겠소.."」
플레이어는 게임 마스터의 설명에 반응해 각자 자신의 캐릭터가 된 것처럼 대사와 행동 묘사를 합니다. 컴퓨터 게임이라면 선택문 중에 선택하겠지만, TRPG는 그저 자신의 상상만이 한계입니다. 그런 점에서 매우 자유도가 높습니다.
「성기사: "그건 흑마법사겠군. 내게 맡겨두시오! 섭리를 어기는 자를 용서할 수는 없지."라고 말해서 의뢰를 받습니다.」
「도적: 잠깐, 그런데 의뢰비를 말 안했어. "그런데 해결 비용은 얼마나 주시려는지? 저희 네 사람이 움직이려면 푼돈으로는 곤란하군요." 마을 이장의 수입은 어느 정도지? 최대한 우려내기 위해서, '거리 지식' 기술을 굴려보겠어.」
「마법사: 진짜 흑마법사가 관련된 일이라면 성직자를 한명 고용하는게 좋아보이는데.」
이런 식으로 자연스레 대화를 통해 정보를 얻고, 각자 대사하고 행동을 묘사합니다. 전투, 교섭, 조사, 탐색, 추리 등의 요소가 주요 컨텐츠로 뭔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거나, 전투가 필요한 경우 룰북에 명시된 규칙에 따라 진행합니다. 전투의 경우, 주사위를 굴려 어떤 무기를 사용해서 어느 정도 피해를 입히는 등입니다. 시나리오 클리어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참가자 전원이 다 함께 노는 것이 이 게임의 목적입니다.
물론 이렇게 글로만 설명해드리는 것보다는 직접 해보는게 이해가 좀 더 편할 것입니다. 하지만 직접 하기엔 너무 쑥스러워서 분위기를 알고 싶어, 라고 하시는 분들에게는 팟캐스트 “탁상예능”을 추천해드립니다. 다른 참고 자료와 달리 진짜 플레이 실황을 녹음, 편집한 미디어라 "진짜" 플레이가 궁금하다면 한 번쯤 들어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TRPG라는 게임은 상당히 마이너적이고 어떻게 보자면 이러한 고생을 겪어가면서 할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되는 취미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모으는 과정도 힘들고,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에도 조건이 많이 들어가는 취미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TRPG는 재미있습니다!
인간은 새롭고 다양한 체험을 좋아합니다. 소설과 영화는 대리체험으로서는 훌륭하지만, 능동성이 부족해서 관객의 관점이 될 수 밖에 없죠. 보드게임류는 직접 체험이지만, 승패에 철저하고 어느 정도 난이도가 높습니다. 스포츠라면 육체 능력이 낮은 사람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컴퓨터 게임으로도 훌륭한 RPG가 많이 있지만 단순히 정해진 시나리오를 밀접하게 따라가는 물건이 대부분이고, 자유도가 높은 CRPG라도 온갖 행동을 다 상상 가능한 TRPG에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TRPG는 능동적으로 참가하기 때문에 대리체험으로서 깊이가 깊으며, 엄격한 규칙을 갖고 있으면서도 스포츠에 비해 '승리하는 즐거운 게임'을 지향합니다. 때문에 '영웅 체험'을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어서 만족도가 높습니다.
게다가 TRPG는 사회적 게임입니다. MMORPG는 가상세계에 사회를 구성하지만, 인간의 본성이 날것으로 드러나는 몹시 각박한 세계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TRPG는 소집단의 사회 게임으로, 룰을 지키고, 같은 참가자끼리의 예의를 중시하며, 대화와 교섭을 중시하며, 모두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돌아가고, 공평하면서도, 노력이 보상받는 것을 지향합니다. 때문에 사회성과 사교성을 길러주는데 좋은 게임이죠.
한편 모처에서 요약한 바에 의하면, "이야기를 만들고, 보고, 겪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 TRPG의 묘미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4년이라는 어쩌면 길면서도 짧은 기간에 자기 계발을 위해 힘쓰는 것도 좋지만 한번쯤은 힘든 자신을 위해, 그리고 주변 친구와의 우애를 다지기 위해서라도 TRPG를 해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최운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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